재원 : 학전이 3월 15일 문을 닫는다. 재정난과 김민기 대표의 건강 문제가 겹치면서 폐관을 결정했다. 대학로에 문을 연 지 33년 만의 일이다. 배울 학(學)에 밭 전(田), 학전은 말 그대로 ‘배우는 밭’이었다. 그래서 김민기는 학전을 ‘못자리’라 불렀다. 이곳에서 싹을 틔우고 추수는 큰 바닥으로 가서 거두라는 그의 생각대로 학전은 한국을 대표하는 많은 배우를 배출했다. 학전을 거친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김광석의 콘서트와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은 학전의 자랑이자 한국 공연문화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런 학전이 뒤안길로 사라진다.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오늘은 김민기의 노래 이야기다.

주식 :

어깨동무 부르던 <아침이슬>

김민기 하면 <아침이슬>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이자 시대의 노래다. 1971년 발표와 함께 아름다운 노랫말로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받았으나 1972년 김민기가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We Shall Overcome>,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불렀다는 이유로 다음 날 동대문서로 연행되고 그의 레코드는 전량 압수 및 판매 금지됐다. 1975년 긴급조치 9호 발표 이후 <아침이슬>은 금지곡으로 묶였다. 수많은 금지곡 가운데 뚜렷한 이유 없이 금지곡으로 묶인 곡은 <아침이슬>이 유일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생명력은 굳세고 질겼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시위 현장에서, 각종 모임의 마지막에는 어깨동무하며 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마침내 1987년 6월 항쟁 이후 금지곡의 족쇄를 풀고 우리 품으로 돌아왔다. 엄밀히 말하면 이 노래는 우리 품을 떠난 적이 없었다. 서로를 격려하고 결의를 다지는 자리에서 늘 함께했다. <아침이슬>과 함께 시대의 아픔을 보듬으며 더 나은 사회를 꿈꿀 수 있었다.

독일 그립스 극단 단원들은 김민기가 베를린에 갔을 때 그를 위해 독일어로 ‘Morgentau, 아침이슬’을 불렀다. 독일어 번역은 ‘지하철 1호선’ 원작자인 폴커 리트비히가 맡았다.

‘그의 시련’에서 ‘나의 시련’으로

무엇이 이 노래를 특별하게 했을까? 금지곡과 민주화운동의 상징이라는 단어로 이 곡의 마력을 다 설명할 수 없다. 2018년 JTBC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아침이슬> 탄생 과정을 설명한 바 있다. 반지하 미술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막히면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아침이슬>은 그렇게 만든 노래였다. 처음에는 예수나 석가모니 같은 성자들의 고난을 염두에 두고 “그의 시련”으로 썼으나 그 이후가 풀리지 않고 막혔다. 이 대목을 “나의 시련”으로 바꾸니 술술 풀렸다고 회고한다.

이어지는 가사를 보면 “나 이제 가노라 /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 나 이제 가노라”로 시련을 딛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소 비장해 보이지만 타인이나 위인이 아니라 나의 시련, 나의 결의를 이야기하고 있어 사람들은 노래에 자신을 이입할 수 있었고 공감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또 ‘진주보다 더 고운’, ‘내 맘에 설움’, ‘아침 동산’, ‘작은 미소’처럼 동시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낱말에 이어지는 ‘찌는 더위’, ‘나의 시련’, ‘거친 광야’는 고된 현실을 딛고 일어서자는 결의와 결단을 끌어낸다. <아침이슬>의 매력은 바로 이 고뇌와 심리적 변화에 대한 듣는 이들의 공감에 기인한다. 굳이 민주화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걷어내도 그 자체만으로 빛이 난다.

그러나 군사독재정권은 이 노래가 못마땅했다. 1980년대 초 어느 날 또 수사기관에 끌려간 김민기에게 수사관은 <아침이슬> 가사의 뜻을 물었다. 수사관의 풀이는 이랬다. ‘긴 밤’은 유신체제를, ‘태양’은 김일성 체제를 뜻한다며 “긴 유신체제를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을 맞이하자”는 노래 아니냐는 논리였다. 김민기는 “양희은은 1970년에, 나는 1971년에 이 노래를 불렀다”고 설명한 후 10월 유신이 몇 연도였는지 되물었다. 수사관은 대답이 없었다 한다.

김민기, ‘식구생각’

권력과의 불화 속에 만든 <식구생각>

김민기는 1974년 카투사로 입대해 미군방송(AFKN)에서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어느 날 보안부대로 끌려갔다. 그 자리에는 중앙정보부 요원이 있었다. 그는 대뜸 “노래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유신 반대 시위에서마다 그의 노래를 부르니 아예 포섭하려 했던 듯싶다. 그렇게 만든 노래가 <식구생각>이었다. 신중현이 각하 찬양곡을 만들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아름다운 강산>을 만들었다면, 김민기는 그 시절 가난한 농촌의 일상을 아이의 눈으로 그렸다. 중정 요원은 “이거 안 되겠군” 한마디를 남겼다. 정권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노래였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

2. 미류나무 따라서 곧게 난 신작로 길 / 시커먼 자동차가 흙먼지 날리고 달려가네 / 군인가신 오빠는 몸 성하신지 / 아빠는 씻다 말고 먼 산만 바라보시네

3. 이웃집 분이네는 무슨 잔치 벌였나 / 서울서 학교 댕긴다던 큰언니 오면 단가 뭐 / 돈 벌러간 울 언니는 무얼 하는지 / 엄마는 괜히 눈물 바람 아빠는 괜히 헛기침만

4. 겨울 가고 봄 오면 학교도 다시 간다는 데 / 송아지는 왜 판담 그까짓 학교 대순가 뭐 / 들판엔 꼬마애들 놀고 있는데 / 나도 나가서 뛰어놀까 구구단이나 외울까 말까”

국방부가 금지를 요청한 <늙은 군인의 노래>

결국 그는 영창에 보내졌고 강원도 인제군 원통면 12사단으로 재배치되었다. 정권에 밉보여 군 생활이 고달파진 겨울 어느 날, 퇴역을 앞둔 탄약선임하사가 막걸리 두 말을 들고 그를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이로 짐작건대 이 선임하사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겪었을 연배다. 여기에 직업군인이자 하사 신분으로 전역을 앞두었다면 30년 세월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간다. 노병의 아스라한 회한과 설움은 ‘아~ 다시 못 올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꽃다운 이 내 청춘’, 이 한 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79년 양희은의 목소리를 빌어 이 노래는 세상에 나왔지만, 자신의 이름이 아닌 미대 친구인 김아영 작곡으로 써야 했다. 김민기 이름 석 자로는 심의를 통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사관과 일반 사병들 사이에서 이 노래가 불리자 국방부는 기어이 ‘사기 저하’와 ‘군기 해이’를 이유로 전군에 금지령을 내렸고 문공부 장관에게 금지곡 지정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공윤이나 방윤이 아닌 국방부에 의해 금지곡이 된 매우 특이한 경우였다.

시민군도, 진압군도 부른 노래 <늙은 군인의 노래>

금지곡으로 묶였다고 안 부르는 건 아니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1980년 5월 광주에서도 불렸다. 그 시절 시위대가 부를 노래가 마땅치 않았다. 기껏해야 <고향의 봄>이나 <애국가> 정도였다. 시위 현장 노래치곤 꽤 소박했던 셈이다. 그나마 <늙은 군인의 노래>에서 군인을 투사로 바꾸어 부르면 제법 현장과 어울렸다. 특히 “아~ 다시 못 올 / 흘러간 내 청춘 / 푸른 옷에 실려 간 / 꽃다운 이 내 청춘” 후렴구는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어 인기였다.

그런데 이 노래는 시위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진압군도 불렀다. 애초 금지곡이 된 사유도 이 노래가 싫었던 장교들 때문이었다. 그렇다 해도 정반대 입장에 선 시위대와 진압군이 같은 노래를 부르는 상황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낮은 곳, 힘없는 이들을 보듬는 휴머니즘

김민기 노래가 울림이 있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바탕에 두기 때문이다. 다시 못 올 흘러간 청춘을 아쉬워하는 건 진압군 병사들도 다르지 않았기에 시위대와 진압군 모두 목놓아 부르지 않았나 싶다.

그의 다른 작품들 역시 우리 사회 낮은 곳, 힘없는 이들을 향한다. 제대 후 부평 근처 공장에 취직해 함께 생활한 노동자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만든 <상록수>, 1984년 LA 올림픽에서 메달을 못 따고 떨어진 선수를 보며 만든 <봉우리>, 탄부로 일하며 탄광촌 아이들이 쓴 글을 엮어 만든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등 장삼이사들의 삶과 사연이 담겨 있다. 무려 4000회 공연까지 이어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중단한 이유도 배우들이 부속품처럼 되는 상황이 싫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진하게 묻어 있다.

“헬로 아저씨 따라갔단다”

김민기의 이런 시선이 담긴 노래 가운데 <혼혈아>가 있다. 1971년 데뷔작 B면 4번째 곡은 <종이연>으로 적혀 있으나 이 곡의 원제는 <혼혈아>다. 공윤의 심의 때문에 곡명이 바뀐 사례다. 22년이 지난 1993년이 돼서야 김민기 2집에 원래 제목대로 이 노래가 수록됐다. 무엇보다 <혼혈아>를 듣노라면 가슴이 아리다. 사연을 요약하면 이렇다.

한 아이가 있었다. 혼혈아로 피부색이 달라 친구가 없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안 오신다. 남겨진 편지 한 장이 있어 옆집 아저씨께 가져가니 읽고서 한숨만 쉬신다. "네 어머니 헬로 아저씨 따라갔단다". 그럼 뭘 하고 놀까? 종이연이나 날리자. 구름 위까지. 하늘 끝까지.

그 시절 주한미군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혼혈아로 부르지 않았다. '튀기'라 불렀다. 국어사전에서 ‘튀기’를 찾으면 “종이 다른 두 동물 사이에서 난 새끼”로 설명한다. 동물에 쓸 단어를 사람에 쓴 것이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따돌리고 민족의 순수혈통을 더럽힌 잡종 취급을 했다.

가련한 소년을 화자로 "내 아버지는 도박꾼이었고 어머니는 재단사였다"는 가사의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은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한 소설처럼 느껴지지만 <혼혈아>는 우리 사회 어딘가에 있었을 아이의 이야기라 더 사실적이다. 그런 아이에게서 어머니마저 떠났다. 천애고아인 셈이다. 김민기의 많은 노래 가운데 가장 눈에 밟힌다.

‘혼혈아’란 제목이 못마땅했던 공윤은 ‘종이연’으로 바꿨지만 김민기는 훗날 원 제목으로 음반에 다시 수록했다

3월 15일이면 학전이 문을 닫는다. 한 시대가 문을 닫는다. 그곳에서 울고 웃었던 기억도 이제는 추억이 되었다. 그 앞에 김민기의 쾌유를 빌며 고마움을 전하는 꽃 한 송이 놓으러 가야겠다.